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켄트 왕국 (문단 편집) == 전성기와 몰락 == [[게르만족]] 토착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Cantuariensis)가 [[가톨릭]] 포교를 시작해 국왕 '''애델베르흐트'''[* 고대 영어로 Æthelberht. 애설버트. 재위 589년~616년]가 개종하고 기독교 국가로 발전시켰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인 7세기 초에는 험버 강 남쪽의 [[잉글랜드]] 전역을 지배했고, 이후에는 현재의 [[서리(잉글랜드)|서리]](Surrey)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나중에 [[브레트왈다]]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의 치세동안 켄트는 잉글랜드에서 4번째로 부유해졌다. 그러나 그의 사후 펜다 왕 아래 최전성기를 누리는 머시아의 침공에 속국으로 전락했다. 7세기 후반 [[서식스]]의 공동왕 베르툰과 안둔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사촌인 에아드리치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곧 [[웨식스]]의 패왕 [[캐드왈라]]의 공격으로 에아드리치는 축출되고, 캐드왈라의 동생 물(Mul)이 왕위를 차지한다[* 이후 캐드왈라는 서식스를 공격해 두 공동왕을 죽이고 서식스를 정복한다.]. 8세기 중반에는 [[머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해 명목상으로 간신히 유지되다가 나중에는 머시아의 왕 '''오파'''(Offa)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9세기경 [[머시아]]의 베오른울프(Beornwulf)와 [[웨식스]]의 에즈베르흐트([[에그버트]])간의 전쟁에서 머시아가 패배하자 켄트는 웨식스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871년 왕위가 폐지되면서 이후에는 웨식스의 영지가 되었다. 바이킹의 침공이 점점 거세지던 9세기 초부터 켄트는 부유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침공에 시달렸다. 804년 수도 켄터베리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고, 811년에는 켄트의 군대가 섀피 제도의 바이킹 요새를 공성하기도 했다. 그 후 50년 동안 로체스터와 켄터베리, 그리고 웨식스 해군과 연합해 바이킹과 전쟁을 벌이는 등 양측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에 바이킹은 해안 지대에 다양한 요새를 건설해 앵글로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9세기 중반 '''[[이교도 대군세]]'''의 첫 희생양이 켄트였는데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의 최동단에 위치해있었고, 앞서 말한대로 부유했기 때문이었다. 바이킹 군대는 켄트에 상륙해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을 저지르며 동앵글리아로 진격했고, 켄트는 885년, 웨식스의 [[앨프레드 대왕]]이 해방시킬 때까지 데인족(바이킹)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고 892년 [[앨프레드 대왕]]이 구트룸 1세를 격파하면서 켄트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 북부 프랑스를 공격하던 350척 규모의 바이킹 함대가 켄트에 상륙했고, [[동앵글리아]]의 데인족 군대도 [[앨프레드 대왕]]에게 반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앨프레드 대왕은 그 모든 침략군을 무찔렀다. 켄트는 [[잉글랜드 왕국]]으로 국호가 변경된 이후에도 여러번 데인인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1011년에 있었던 '거인' 토르켈의 켄터베리 공성전이 잘 알려져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